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작 일 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내 주변은 너무 달라져있었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은 모두 졸업을 해 어느새 직장인이 되어있었고,
나는 학점이수와 졸업까지 6개월이란 기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교환학생을 마칠 무렵, 이미 내 마음속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리라 라는 굳건한 의지가 생긴 후였다.
독일에서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과 일하며 살아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조금 더 다른 세상을 보고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
이미 내 마음속엔 졸업 후 한국에서 취업을 하리라는 선택지는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돌아와서 다시 일상에 적응할 즈음, 어느 날 저녁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독일에 유학을 가겠다고?"
이미 돌아오기 전, 엄마와 몇 차례 통화를 하면서 살짝 귀띔은 해둔 상태였다.
아직 가겠다고 확정 지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독일로 다시 오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한 상태였다.
어학시험을 준비하려면 통상적으로 얼마나 걸리는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등 이미 내 머릿속은 새로운 삶으로 가득했다.
"응, 갈 거야"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덤덤했다.
폭풍은 그다음에 몰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모가 저녁을 먹으며 다짜고짜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너네 엄마 힘든 거 알면서 굳이 가야겠니?"
이모는 내가 얼른 취업해서, 엄마를 편안하게 해 주길 바랬다.
이모 옆에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내심 그것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5년 후의 삶이 너무 뻔히 보였고, 그건 내가 원하는 삷이 아니었다.
"응, 갈 거야"
이기적인 선택이라는건 알고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래 우리집 형편이 가장 안좋았던 때였다.
너무 단호한 내 태도에 이모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나는 왜 독일로 가는 것이 나은지 설명해야 했다.
나의 목표는 명확했다.
나는 항상 나의 일을 하고 싶었고,
그 이후로는 건축사를 딴다는 것은 나에게는 언젠가는 해야 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다.
건축사를 딴다.
한국건축사든 독일건축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걸로 나의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곳이 내가 시작할 곳이었다.
한국에서 졸업까지 6개월,
운이 좋아 바로 취직해서 설계사무소에서 3-4년,
내가 졸업한 학교는 건축학인증이 되는 커리큘럼이라
졸업 후 3-4년 실무수련 후 건축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합격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보통 합격률이 10%가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야근 없는 설계사무소는 거의 없다.
그럼 3-4년 내내 주말에 건축사 시험에만 올인하여 운이 좋아 합격했다고 하면 총 3년인데,
하지만 이렇게 정말 할 수 있을까.
주변에 회사를 그만두고 건축사 시험만 준비했는데도 떨어지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빨라야 5-6년 정도 (사실 그것도 엄청 짧은 기간이지만),
더 걸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훨씬 많았다.
다시.
한국에서 졸업까지 6개월,
독일에서 어학 기간을 최대 2년 (어학 비자가 최대 2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석사과정 2년, 취업해서 2년, 총 6년 반.
독일은 시험제가 아니라 실무 2년 후 (물론 모든 업무범위를 수련해야만 한다.)
건축사 등록만 하면 되니, 6년이면 독일 건축사가 된다.
건축사를 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5-6년, 그 길로 가기만 한다면 확실한 6년.
야근과 시험 압박에 시달리면서 다니는 회사 생활 5-6년,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내 삶을 만들어가는 6년.
그리고 독일 건축사 취득 후,
나중에 한국에서 활동을 하고 싶다면 한국 건축사와 협업을 하는 방법도 있고,
직접 한국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다면 건축사 시험 총 3과목 중 1교시를 면제받을 수 있다.
이때의 비교가 과연 객관적이었는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분명 한국에 있으면 저축도 할 수 있을 테고,
모국어로 일을 할 테니 일을 좀 더 빨리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의 계획들이 모두 내 생각처럼 흘러가주리란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독일을 향하고 있었고, 나는 가족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럼 그 돈은 누가 대는데? 너네 엄마 보고 또 고생해서 니 학비를 대라는 거니?"
물론 독일은 학비가 없다.
하지만 이모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서 드는 생활비며 보험이며, 나라는 인간이 숨을 쉬기만 해도 드는 돈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내키지 않았다.
떠나기 전 돈을 모아야 했다.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모아야 했다.
포기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지,
교환학생 때 들었던 수업은 모두 학점이수를 해서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바로 설계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저축해둔 돈, 인턴 월급을 100% 저축, 할머니에게 얹혀살기,
과외, 허리띠 졸라매는 생활, 벼룩시장에 소장품 팔기 등
다행히 떠나기 전 목표했던 금액과 비행기표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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