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겨울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춥다.
기온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축축하고 음울하다.
해는 뜨지만 해가 비추는 날이 많지 않고,
그런 시기가 거의 6개월 정도가 지속되기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여름에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독일은 겨울에 습도가 더 높은 편이라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더 우울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2011년 독일로 교환학생을 왔을 때의 일이다.
학기가 시작한 것이 여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독일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은 그때 내가 느낀 것이 가을이었음을 알지만,
그때는 너무 추워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독일의 겨울을 만났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였다.
바닥난방이 있는 한국에서는 밖은 추워도 집안에 들어오면 금방 훈훈해지곤 했는데,
이곳의 라디에이터는 따뜻한 공기만 내뿜을 뿐 나의 몸속까지 덥혀 주지 못했다.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추워도 뜨끈하게 보일러를 올려놓고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면 금방 몸속까지 따뜻해졌다.
겨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따끈한 바닥에 이불을 덮고 엎드려 베란다에서 차가워진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는 일이었다.
차를 마신다는 일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차를 마시는 습관이 없는 집에서 자란 나는 한겨울에도 무조건 냉수 만을 마시던 아이였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마트를 갔을 때에도 차는 나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내가 살 물건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친구들이 차 한잔을 내줄 때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필요에 의해 차를 구입했다.
몸속을 덥히기 위해서였다. 내장이 너무 차가웠다.
하지만 그저 몸을 데우기 위해 티백으로 된 허브차를 마셨을 뿐 차에 대해서는 큰 관심은 없었다.
그렇게 독일의 추위에 슬슬 질려가고 있을 무렵, 친한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여행을 다녀왔다며 건넨 그 선물은 마리아쥬 플레르(Mariage Fréres)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내 인생 처음의 잎차이자 홍차였다.
그동안 티백차는 많이 봐왔지만 잎차는 처음이었다.
첫 개봉했을 때 그 향이 우선 충격적이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풍선껌이었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베리향과 알 수 없는 향이 오묘하게 섞여 나는 그 향기에
눈이 번쩍 코가 번쩍 얼굴에 있는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홍차에 여러 가지 과일과 꽃향을 입힌 '가향차'인데,
그때는 홍차에서 그런 향이 날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이었다.
급한 대로 옆방 친구에게 티백을 빌려
머그컵에 담고 3분쯤 우려낸 후, 티백을 건져냈다.
(독일에서는 잎차를 담아 우려낼 수 있는 Teebeutel테보이틀 이라는 티백만을 따로 판매한다)
'차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이 후각을 자극하지만,
입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맛은 없고 뒷맛은 쌉싸름하고 깊은 맛이 나는 듯한 홍차의 맛.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도 이건 정말 반할 만했다.
그때 한 문장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끓이기만 하면 세상에서 홍차보다 맛있는 음료는 없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책에 나온 구절이다.
소장하고 있는 만화책 중 하나로, 경제학자 유교수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관찰하며 겪는 일들을 에피소드로 엮은 책이다. 참 재밌게 봤던 에피소드 중 하나로 13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인 유교수가 손님에게 홍차를 접대하기 위해,
예전에 알던 영국인 교수가 대접해줬던 맛있는 홍차 끓이는 법을 기억을 더듬어 찾는 내용이다.
그 영국인 교수는 홍차에 대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위의 문장은 그 영국인 교수의 대사였다.
제대로 마셔보고 싶었다.
티백으로 우려낸 것이 이 정도인데 제대로 끓이면 얼마나 맛있는 거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홍차 끓이는 법을 검색했다. 사람마다 설명이 다 달랐다.
홍차의 종류마다 끓이는 방법이 다른 것도 나를 헷갈리게 했다.
안 그래도 초보인데 여러 가지 차 이름들에 어려운 용어, 물이 어떻고, 온도가 어떻고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사람들의 설명에서 공통으로 된 것만 뽑아 나름대로 정리를 했고, 최소한의 도구만으로 끓여보았다.
준비 : 차를 우려낼 찻주전자, 찻잔, 전기포트, 찻잎, 거름망, 시계
1. 물을 끓여 차를 우릴 찻주전자와 찻잔을 데운 후, 데운 물을 버린다.
2. 찻잎을 티스푼으로 한 스푼 넣고(한잔 당 한 스푼, 한잔은 약 200-250ml 정도), 뜨거운 물을 높은 곳에서 찻주전자 안으로 붓는다.
3. 3분 우린다.
4. 거름망으로 찻주전자에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른다.
티백으로 우린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향이나 맛이 훨씬 풍성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차를 우리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신성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냥 물을 끓여 티백에 붓고 우려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뜨거운 물을 타고 둥실둥실 춤을 추는 찻잎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 후로 차에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다.
차는 차가운 몸을 녹여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생채기 난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내 안에서 뒤섞인 찌꺼기 같은 감정과 생각들이 차 한잔에 차분히 가라앉아 원망하는 마음들을 가라앉혀 주었다.
또한 차 한잔하며 멍 때리고 있자면 마치 명상하는 것과 비슷하여
그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차 한잔의 여유는 늘 과거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던 나를 현재로 데려와 주었다.
그렇게 차(茶)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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