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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세이

[베를린에세이] 베를린에 도착하다

2013년 3월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을 떠나 테겔공항으로 도착하는 동안, 

비행기 안에서 내내 교환학생을 끝내고 돌아와 한국에서 지낸 6개월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시간.

 

여권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나오는데, 처음으로 도착한 테겔공항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몇걸음 걸어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출구?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먼저 베를린에서 어학을 시작한 친구가 그곳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마중을 나온다는 얘기도 없었고 도착시간을 얘기한 적도 없었던것 같은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담담하게 친구는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

 

놀라운 마음 반, 실망스러운 마음 반.

사실은 마중을 나올 사람은 다른사람이었다.

 

 

일년째 만남을 지속해오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친구였는데,

내가 베를린에 도착할때 베를린으로 와서 함께 며칠간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을 했었다.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출발시간이 늦어져 도착이 나보다 늦더랬다.

 

맨날 약속에 늦더니,

베를린에 도착하는 날까지 늦는다.

 

낯선 곳에 막 도착한데다 그당시 테겔 공항은 와이파이도 되지 않던터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 급한대로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약속장소를 정했다.

방금 공항에 도착한 내가 이 짐을 들고 중앙역까지 걔를 데리러가야한다니.

 

나를 마중나와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과 

민망한 기분이 교차했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추위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3월이 이렇게 추운거였나.

안에 껴입은 패딩은 아무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 추위는 3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도착하던 날 눈으로 뒤덮인 베를린 유태인 기념비, (c) Hyejin Cho

추웠던 날씨만큼 베를린에서의 시작도 매서웠다. 

 

 

 

도착한지 이틀만에 일년 간 만남을 이어오던 남자친구와는 이별을 하기로했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나 혼자 애를 쓰는 기분이 들었고, 

그의 될대로 되겠지 식의 태도를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몇개월간 지속되었던 장거리 연애에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곁을 떠날 사람을 위해서 더 이상 나의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대로 집을 구하기 전 잠시 들어가기로 했던 숙소로 짐을 옮겼다.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3주 후면 다시 집을 구해 떠나야하지만, 그래도 나의 첫 보금자리였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했다. 

4월 초 이사가는 그날까지 눈내리는 창밖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3월 내내 방에서 보았던 풍경, (c) Hyejin Cho

필요한 것 부터 해야할 일 까지 모든 것을 혼자 챙겨야했다. 

감상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당장 먹을 것부터 생필품, 핸드폰, 필요한 서류들까지 하나씩 담담히 처리해 나갔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3주 후 이사할 집이었다. 

 

독일 내 한국사람들이 이용하는 사이트부터 집을 구하는 독일의 포털들까지 

꼼꼼히 뒤지고 미친듯이 메일을 보냈다.

  

연락이 오면 약속을 잡고 집을 보러다녔다. 

집을 보러 다니는 틈틈이 서류들을 처리하고, 학원을 알아보는 등 이곳에서 살아갈 준비를 했다.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매일매일 너무나 피곤했다. 

날씨때문에 마음까지 움츠러 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혼자임을 실감했다.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혼자라서 자유로웠다. 

 

 

어느 날 기차역에서 보았던 풍경, 회색의 스산한 베를린, (c) Hyejin Cho

혼자라는 것이 사무치게 느껴질 수록 더 자유로움을 느꼈다. 

 안에 흩어져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추위로 인해 안으로 움츠러 들어, 

가슴 한켠에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날씨가 추우면 추울 수록 안에 그것들이 더욱 더 똘똘 뭉쳐 내면은 고요해졌다. 

무엇과도 부딪히지 않는 내면이 고요한 그 상태가 좋았다. 

 

추위. 고요함.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레임. 

낯선 곳에서 나의 새로운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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